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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22일 수요일

마분지에 원고를 쓴 소설가, 욕먹듯 밥을 먹었던 시인을 만나다


 
혹시 소설가 이문희, 임영조 시인을 아십니까? 모르신다면... 처음 들어본 이들이라면... 저와 함께 이 두 문인을 만나러 함께 가보시죠. 


보령시의 문화와 정신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
2013년 문을 연 보령 문화의 전당입니다.
이곳에는 보령문화원, 관광홍보관, 갯벌생태과학관과 보령박물관 그리고 별관에 보령문학관이 모여있습니다. 
 

보령문학관에는 보령지역 출신 문인 두 분의 삶과 작품세계를 전시해 놓고 있는데, 그 주인공은 소설가 이문희 작가와 임영조 시인입니다.



먼저 보령 출신의 소설가 이문희님. 저는 이곳에서 처음 그의 이름과 작품을 알게 되었습니다.

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를 전시관 한편에 애니메이션 영상으로 제작해 관람객들이 볼 수 있게 해 놓았는데, 그 내용을 보니 1957년도에 있었던 일이네요. 당시 ‘현대문학’지의 신인추천 심사위원인 김동리 선생은 수북하게 쌓인 원고지 속에서 마분지에 쓴 원고가 있는 것을 보고 읽지도 않고 휴지통에 버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추천할 만한 작품이 없었고,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버렸던 마분지원고를 다시 꺼내 들고 읽었고, 작품성에 깜짝 놀란 김동리 선생이 마분지에 쓴 이문희작가의 작품을 당선시켰다는 일화입니다.
이렇게 1957년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문희 작가는 막걸리처럼 텁텁하고 소탈한 문체와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능력으로 김동리 선생이 ‘소설을 타고난 사람’이라 칭찬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소설을 타고난 사람이다. 피가 마르도록 생각을 쥐어짜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척척 쓰는 대로가 소설이 되어 떨어지기 마련인 그런 사람이다."
                                                     - 1957년 ‘현대문학’ 김동리 소설추천기




궁금한 마음에 그에 대해 더 알아보았습니다. 이문희 작가는 1933생.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1990년 돌아가셨는데, 57년 ‘현대문학’에 단편 ‘왕소나무의 포효’가 추천되어 등단, 80여 편의 장,단편소설을 남겼고, ‘현대문학’에 연재했던 장편 ‘흑맥’으로 1965년 제11회 현대문학신인상을 수상했고, 1981년 장편 ‘산바람’으로 대한민국문학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우리 문학에서 보기 드문 충청도 방언의 능숙한 사용은 그의 문체를 더욱 빛냈다고 하는데 그런 그를 설명하고 있는 문학관의 안내문엔 ‘문학 연구가들의 본격적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한 번도 문학계에서 집중적인 조명을 받지 못해 그를 아끼는 독자와 평론가들이 안타깝게 생각한다는데, 왜 이렇게 알려지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문단에서 교류가 부족했거나, 문단의 유행을 타지 않고 그만의 작품세계를 고집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문희작가가 쓴 장편소설 '흑맥'입니다. 1963년 현대문학 12월호부터 1년간 연재된 작품으로
6.25 한국전쟁 뒤 서울역 주변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전쟁이 가져다 준 인간들의 어두운 삶을 그린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1965년이만희 감독, 신성일, 문희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집니다. 영화에서 깡패역인 신성일이 아름답고 순수한 아가씨 문희를 사귀면서 깡패짓을 청산하려 하는데 깡패들이 자신들을 배신한 신성일에게 복수, 비극적인 결말로 끝나는 내용. 이 영화로 문희라는 배우는 대종상영화제에서 신인상을 받아 스타의 길을 걷게 되고,  제 9회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 제 3회 청룡영화상 촬영상, 음악상, 미술상을 받게 됩니다.


이문희 작가와 만남에 이어 임영조 시인을 만납니다.
그의 본명은 임세순. 1943년 보령시 주산면에서 태어나 1970년 월간문학 제 6회 신인상 시 부문에 ‘출항’ 당선, 7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목수의 노래’가 당선되어 본격적인 활동을 한 시인입니다.
그의 스승은 ‘껍데기는 가라’로 유명한 신동엽 시인. 중학교 2학년 때 지리선생님으로 부임해 온 선생님인 신동엽 시인이 그의 글재주를 알아보고 계속 글을 쓸 것을 권해 시를 배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동엽 시인은 임영조 시인을 글 잘 쓰는 제자로 키우기 위해 혹독한 연습을 시켰다고 합니다. 일주일에 시 한 편씩을 써서 보이면 ‘이 말이 걸린다. 다음에 고쳐와라’ ‘꼭 이 말 밖에 없을까? 다시 생각해봐’ 이런 식으로 한 편을 완성시키는데 석 달이 걸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명의 시인을 만들어 낸 스승 신동엽 선생은 훗날 임영조 시인에게 평생의 한으로 남게 된다고 합니다.


임영조 시인이 제대를 3개월 앞두고 있던 1969년 봄. 잠깐 다녀가라는 스승 신동엽 시인의 전갈을 받았는데, 하필 그 때 김신조등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찾아뵙지 못했고, 얼마후 스승인 신동엽시인의 부음소식을 들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게 시인에겐 평생의 회한으로 남았다고 합니다.




임영조 시인에게 신동엽 시인과 함께 시를 쓰게 한 또 다른 스승은 가난이었습니다.  보령의 시골마을... 아버지는 집안을 돌보지 않았고, 어머니가 베를 짜 식구들이 겨우 밥을 먹었다고 합니다. 학교도 서울 대동상고를 다녔는데, 서울전신전화국 급사로 일하면서 공부하느라 5년만에야 졸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사진을 보면 '1971년 총각시절 끝머리쯤 도화동 산꼭대기 자취방에서. 재산은 저 두 개의 빛나는 상장뿐'이라는 글이 보이는데, 산꼭대기 판잣집, 책장을 제외하면 가구도 없고 누울자리만 있는 그런 좁은 방에서 그는 시를 썼고, 등단을 합니다.

그가 쓴 작품을 보면 그의 어린시절 가난을 볼 수 있는 시도 있습니다.



고2 때 기말시험 보던 날

납부금 안 냈다고 쫓겨난 나는
고향집에 내려가 식구들 몰래
새끼 밴 염소를 내다 팔았다


간재재 넘어 삼십여 리 길
팔려가는 낌새를 알아차린 듯
거품 물고 버티며 울부짖던 염소를
판교장에 끌고 가 헐값에 팔았다


삼십 년 지난 오늘
이제야 비로소 깨닫느니
내가 염소를 내다 판 게 아니라
염소가 나를
대처에 판 걸 알았다

이 고달픈 生을
어디에 안녕히 뿌려놓지 못하고
세월의 볼모처럼 덜미잡힌 채
날마다 헐레벌떡 끌려온 내가
굴레 쓴 염소임을 알았다.
                     <염소를 찾아서 3 / 임영조 >

옛날엔 소를 키워 자식을 대학에 보냈는데, 아마 시인의 집은 소를 살 형편도 안되었던 것일까요? 염소를 키웠는데, 그래도 집안의 재산이었던 울부짖는 염소, 그것도 새끼 밴 어미를 팔아야 했던 시인의 가난. 그것은 임영조 시인의 시세계에 깔려있었습니다.




가난과 함께 한 임영조 시인의 또다른 스승은 외로움이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의 또 다른 말은 외로움일텐데, '혼자 먹는 밥'이라는 그의 시를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먹기 위해 사는가, 묻지 마라
누구나 때가 되면 먹는다
살기 위해 먹는가, 어쨋거나
밥은 산 자의 몫이므로 먹는다
빈둥빈둥 한나절을 보내도
나는 또 욕먹듯 밥을 먹는다

은행에서 명퇴한 동창생은 말한다
(위로인지 조롱인지 부럽다는 듯)
시 쓰는 너는 밥값한다고
생산적인 일을 해서 좋겠다고 말한다

나는 아직 이 세상 누구를 위해
뜨끈한 밥이 돼본 적 없다
누구의 가슴을 덥혀줄 숟갈은커녕
밥도 안 되고 돈도 안 되는
시 한 줄 못 쓰고 밥을 먹다니!
                               '<혼자 먹는 밥. 임영조>

'빈둥빈둥 한나절을 보내도 나는 또 욕먹듯 밥을 먹는다.'
'시 한 줄 못쓰고 밥을 먹다니!'
외로운 시인은 혼자 밥을 먹으면서 그 고독한 세계 속에서 시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죄책감을 갖고 살았던 것같습니다. 외로움, 고독감, 좋은 글을 써내야 하는 부담감... 그것은 글쓰는 이의 천형같은 운명이겠죠. 하지만 그렇게 겪은 아픔이 바탕이 되어서일까 그의 시는 친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편안함을 준다고 합니다.
 



시인은 사당동 총신대역 부근에 집을 얻어, 방 한 칸을 ‘이소당’이란 당호를 붙인 집필실로 만들고 글을 씁니다.
이소(耳笑)는 임영조 시인의 호. 서라벌예대에서 가르침을 받은 스승 서정주 시인이 '너는 귀로 웃으니 이소라는 호가 좋겠다.'며 받은 호입니다. 
문학관에는 이소당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는데, 임영조 시인은 생전에 그의 집필실 '이소당'을 두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비록 남루한 집이나마 나처럼 등이 시린 사람들 두루 찾는 아랫목같이 따뜻한 시집으로 기억됐으면 좋겠다”
그런데 문학관에서 재현해 놓은 방은 그런 따뜻함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뭔가 잘 꾸며놓은 느낌이랄까... 그리고 그가 바랐던 따뜻함이 아니라 겨울 달빛의 차가움같은 것이 느껴지는... 그것이 좀 아쉬웠습니다.


혹시 그리운 사람 올까
가끔 귀 열어놓는다. 허나
허리 삔 바람소리 또 스산하니
문 닫고 귀로 웃는 집이다.
                        < 이소당 시편1 중. 임영조>




"나의 시쓰기는 한 그루의 꽃나무를 가꾸는 정성으로 혼신을 다해 시의 꽃을 피워내고 독특한 향기로 미지의 세계를 향해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고자 노력한다." - 임영조시인의 시론입니다.
그런데 그의 시쓰기에 대한 표현이 조금 잘못된 것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꽃나무를 가꾸는 정성이 아니라 꽃을 피우기 위한 정성이 더 맞는 표현 아니었을까요? 사람들은 꽃이 피면 다들 아름답다고 감탄하지만 그 꽃을 피우기 위해 나무가 겪었을 산고의 고통까지 생각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좋은 시를 보면 시 좋다고 느끼지만 시인이 그 시 한 편을 만들기 위해 고독속에서 겪었을 고통을 대개는 느끼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임영조 시인이 꽃나무가 꽃을 피우는 정성으로란 표현을 썼다면 더 좋았을 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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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조시인은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좋은 시인이 되려면 좋은 시 300편을 암송하고, 200편을 쓰고 100편을 퇴고해야 한다."
시인은 시류에 편승하는데 급급해 다른 시인의 작품, 훌륭한 시를 읽지 않는 다른 시인, 문학도들에게도 일침을 가했던 것이죠.


 



임영조 시인은 그렇게 치열하게 시를 써 여섯권의 시집을 남겼고, 서라벌 문학상, 소월시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쉽게도 2003년 췌장암으로 60세 짧은 삶을 마감했습니다.


 

문학관을 나오는 길, 담장을 보면서 문학과 담 쌓고 사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라고 누군가 의도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담 쌓고 살았던 문학의 담너머를 자주 넘겨라도 보고, 그 안으로 자주 찾아 들어가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습니다.

보령문학관, 이곳을 찾아 모르고 있던 두 명의 작가를 알고나니 새삼 이 공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자극적인 TV프로그램과 스마트폰에서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속에 문학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문학의 향기는 점점 시들고 있는데, 이렇게 문학관이 있어 후대의 사람들이 자칫 잊혀져 사라질뻔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건 정말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또 다른 보령출신 작가인 '관촌수필'의 이문구 작가도 이곳에서 만날 수 있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시 한 줄 안 읽는 사회... 시를 마음에 담고 살기 힘든 시대...
우리 정신은 피폐해져갑니다. 물질은 풍요로울지 모르나 정신이 가난한 사회에서 바삐 쫓기듯 살아가는 현대인들. 그런 우리들을 위해 곳곳에 이런 문학관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아빠, 시가 뭐지? 소설이 뭐야?
혹시나 조만간 이런 질문을 아이들에게 받지 않게라도 말이죠.

아. 그리고 이곳을 찾기 전에 두 문인의 작품을 먼저 읽고 찾으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것같습니다. 그냥 둘러보기엔 많은 이야기가 곳곳에 숨어있는 곳, 작은 공간이지만 큰 울림으로 다가온 곳, 보령문학관이었습니다.

2017년 2월 23일 목요일

보령 벙어리 기생, 말문을 열다

오늘 소개해 드릴 곳은 보령문화의 전당안에 있는 보령 박물관입니다.
방송작가로 KBS에서 ‘TV쇼!진품명품’이란 프로그램을 7년정도 했던 터라 지방 여행을 가면 옛날 유물들을 만나기 위해 박물관을 찾는데, 보령을 찾았으니 보령 박물관도 가봐야죠. 하지만 사실 약간의 선입견은 있었습니다. 국립박물관도 아닌 지역의 박물관이라면 그저 그럴 것이다. 전시품이라고 해 봐야 모조품에, 그것도 그리 많지 않은 전시품들이 있겠지. 그런 생각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박물관을 돌고 나오면서 그 생각이 아주 잘못됐구나 알았습니다. 국립박물관처럼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작지만 알찬 전시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보령 박물관을 함께 돌아보실까요?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면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유물을 먼저 볼 수 있는데요, 보령에서 본격적인 유물발굴조사가 벌어진 것은 1990년대 이후이지만 그 조사에서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한 신석기시대 유물들이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청동기시대로 넘어오면 고인돌을 만드는 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고인돌하면 고창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으신데 보령도 만만치 않습니다. 보령이 오석을 비롯한 돌로 유명한 곳이다 보니 곳곳에 고인돌이 많다고 하는데, 보령에서 고인돌을 볼 수 있는 곳이 박물관 지도에는 다섯 곳만 표시되어 있지만 10여 곳이 넘고, 조사결과 300여기 이상의 고인돌이 있다고 합니다.




또 보령에서는 탁자식, 기반식, 개석식 등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특히 보령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고인돌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평라리에서 발견된 고인돌로 땅 속에 돌로 구획을 만들어 무덤이라는 표식을 해 놓은 형태. 학계에서도 처음 발견된 것이라 보령 평라리식고인돌로 이름 붙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보령댐이 생기면서 수몰되고 말았다 하니 정말 아쉬웠습니다.





박물관투어를 지루해 할 지 모를 아이들을 위한 배려, 고인돌 줄 당기기. 아이들이 좋아할 것같습니다. 




박물관 전시는 시간의 흐름대로 배치해 놓았습니다. 선사시대와 청동기시대를 지나면 백제시대의 유물들이 전시돼 있습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보령리 고분군의 굴식돌방무덤을 재현해 놓은 것. 보령리에 분포한 60여기 고분 중 12기가 1984년 발굴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하는데, 돌로 만든 방 석실묘는 무덤의 주인이 힘이 있는 사람이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다듬지 않은 돌은 초기 백제무덤임을 알려주는 힌트입니다. 백제 후기로 갈수록 다듬은 돌로 돌방을 만들었다고 하니까요. 
보령리 3호고분에서 인골이 출토되었다고 하는데 인골은 모형으로 재현해 놓았습니다.






발굴 때 인골 주위에 놓여있던 유물이 이렇게 실물로 전시돼 있습니다.
백제의 전형적인 토기인 삼발이 토기, 삼족기도 있고, 철로 된 검도 보입니다. 철로 된 검이 있다는 것은 그 무덤의 주인이 상당히 힘이 있던 사람. 그러니까 백제시대, 보령에 힘 있는 유력자가 살았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통일신라시대로 넘어오면 보령 성주사지에서 발굴된 유물들과 크기를 작게 해 볼 수 있게 만든 성주사지탑을 볼 수 있습니다. 성주사지에서 발굴된 유물들... 통일신라 시대 사람의 전형적인 얼굴상일까요? 얼굴 모양의 토기와 흙으로 밎어낸 몸통과 와당. 세련되진 않지만 오히려 투박한 것이 더 정감있는 아름다움을 만듭니다.






 



그리고 성주사가 어떤 사찰이었는지 보여주는 영상을 대형화면으로 볼 수 있는데, 당시 사찰의 규모와 왜 지금은 터와 탑, 비만 남아있는지 쇠락과정을 입체감있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다음은 고려시대로 넘어가는데, 이곳에서 지금까지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도자기를 만드는 곳 하면 이천, 여주, 강진 등을 떠올리게 되는데, 보령에 우리 도자문화사에서 중요한 유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보령시 청소면 진죽리에 신라말, 고려초의 토기 가마터가 발굴되었는데, 확인된 가마는 9기. 한반도 중서부에서 초기 청자가 제작되기 이전의 토기 제작과정을 볼 수 있고, 자기가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이전의 토기 제작과 그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유적이라는 것이죠 보시면 투박하지만 아름다운 토기들입니다.



바로 옆에는 고려청자들이 전시돼 있는데, 그럼 고려시대 강진외에 보령에도 고려청자를 굽는 가마가 있었던 것일까요? 알고보니 강진 등에서 만든 청자를 개성까지 실어 나르다보니 폭풍우나 암초를 만나 배가 보령 앞바다에서 침몰한 경우가 있었겠죠? 그 청자들이 바다속에 있다가 건져 올려진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 청자들을 건져올린 죽도 앞바다는 신안 앞바다처럼 조사외 활동을 하면 처벌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버드나무 아래 오리가 노니는 그림을 그린 흑백상감청자.
그런데 여기 전시된 청자 접시에는 기사라는 글씨가 적혀있는 것이 3점이나 됩니다. 
어떤 뜻이 담겨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이 청자들이 만들어진 해가 기사년임을 의미합니다.



조선시대로 오면 충청수영의 옛 그림이 보입니다. 이런 그림들은 사진기가 없던 시대, 그림을 그리는 화원들을 불러 사진처럼 남긴 것. 나중에 충청수영을 찾아가 이 그림과 비교를 해 봐야겠습니다.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충청수영성은 전라, 경상 좌우영과 비교할 때 가장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고 하니 우리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한 보령시의 노력을 잘 볼 수 있습니다.


또 보령이 낳은 선비들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유품들은 후손들의 기증을 받아 전시를 한다고 하는데, 보령박물관에서는 올해 상반기중에 기증받은 유물을 전시하는 특별전을 준비중이라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보령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의 물품도 볼 수 있습니다.





보령 박물관에서 가장 재미있는 곳은 바로 이곳. 시간의 길 너머 있는 곳입니다.
시간의 길은 철로 위에 유리를 깔고 벽면엔 보령의 과거 사진들을 전시해 놨는데,
이 길을 걸어 터널을 지나자니 시간을 거슬러 가는 기차가 된 기분입니다. 걸어가면 실제로 기차의 기적소리도 들리기도 하는데요, 그런데 이렇게 철로를 깐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어떤 이유에서일까요?
보령 박물관이 있는 장소가 과거 대천역이 있던 곳이기 때문이라는데요, 지금 박물관이 있는 장소가 대천역광장, 그리고 지금의 광장이 대천역이 있던 장소라고 합니다.








     

시간의 길, 터널을 나오면 정겨운 풍경이 펼쳐집니다. 대천역이 나오고 나무전신주와 옛날 우리가 자라온 시간 거리의 모습들이 반갑습니다. 이발소와 철물점, 우체국... 지금은 사라진 거리의 풍경들...
대포집에선 뿌연 연기속에서 왁자지껄 한 잔 기울이며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것같고, 주인 아주머니의 환한 웃음도 정겹습니다. 그 속에 들어가 같이 어울려 대포 한 잔 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지금은 보기 힘든 당시의 달력과 그때 그 술병들, 그 물품들을 어떻게 구하고 그 분위기까지 그대로 재현해 놓았는지 정말 반가웠습니다. 이런 정겨운 곳을 만들어 놓은 보령 박물관의 생각도 고맙고, 저는 개인적으로 이곳이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옛날 거리 끝부분의 영화관 안으로 들어가니 안은 복혜숙이란 여배우의 방입니다. 복혜숙선생은 보령출신으로 1920년대 영화배우로 본격적인 활동을 하셨다고 하는데, 당시 아버지가 의사인 집안에서 태어나 한국영화 초기의 신여성으로 인기를 누렸다고 합니다.
60년 연기인생 동안 약 400여편의 작품을 했다고 하는데, 박물관에서 옛날 여배우에 대한전시공간을 마련해 놓은 것도 참 특이했습니다.




이곳엔 복혜숙 선생 육성이 담긴 영화노래 레코드판도 전시해 놓고 있었는데, 이 정도면 구하기 힘든 희귀음반이겠죠? 그리고 이 방에선 영상도 짧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령에서 태어나고 묻힌 토정 이지함 선생의 방이 마련돼 있습니다.
백성이 부자가 되어야 나라가 부강해질 수 있다고 믿은 보령의 참 지성인 토정 이지함 선생의 영정과 선생이 받은 교지, 토정비결을 보고 또 준비되어 있는 영상을 보며 선생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바쁜 중에도 궁금한 점에 대해 답해주고 전시 유물 해설을 해 준 장래형 보령 박물관 학예연구원께 다시 한 번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문화재, 유물은 말 못하는 아름다운 벙어리 기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맞지 않는 것같습니다. 우리 문화유산은 말 못하는 벙어리 기생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듣지 못할 뿐 그들은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그들이 속 안에 담고 있는 사연이 얼마나 많을까요?
박물관에서 우리 문화유산을 만나시면 잠시 서서 그들이 하려는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조금만 관심을 가진다면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다보면 5천년 역사를 가진 민족, 우리는 더 큰 힘을 갖게 될 것입니다.

문화는 힘이고 역사를 가진 이들의 저력. 제가 보령 박물관에서 본 것은 보령 문화의 저력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