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29일 수요일

하동 최참판댁의 아홉가지 수수께끼


경상남도 하동 악양면 평사리에 있는 최참판댁은 박경리 선생의 소설 ‘토지’의 주인공 서희와 등장인물들이 살던 집. 그동안 하동을 대여섯 번 들르면서도 한 번도 찾지 못했다가 이번에 최참판댁을 가볼 수 있었는데 가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이 최참판댁이란 고택이 원래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살던 양반집이어서 그 저택을 소설의 주 무대로 삼은 줄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가보고서야 그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최참판댁이 만들어진 것은 2001년. 90년대 후반 하동군의 한 공무원이 소설 ‘토지’의 주 무대인 평사리에 최참판댁을 만들자는 제안을 했고, 군에서 그것을 받아들여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어쩐지 양반집이 마을 한 가운데가 아닌 산중턱에 위치해 있어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런 사연이 있었더군요. 원래 이곳은 집이 있던 곳도 아닌 대밭이었다고 하는데 그랬던 것이 한 공무원의 제안으로 하동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TV드라마 ‘토지’의 세트로도 활용되었구요. 아무튼 있는 관광자원도 제대로 활용 못하는 곳이 많은데 그 당시 소설속의 내용이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공무원이나 그것을 받아들여 훌륭한 관광지로 만든 하동군... 박수를 받을 만합니다.


옛날 사대부가에서는 저택의 앞마당을 크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최참판댁도 그 모습 그대로 재현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최참판댁을 찾은 아이들이 투호놀이도 할 수 있고, 전통놀이도 배울 수 있습니다.


최참판댁 행랑채 앞에 서면 솟을대문이 보입니다. 솟을대문은 행랑채나 문간채를 양쪽으로 두고 대문 있는 곳을 한껏 높여 그 집의 권위를 나타내는데, 솟을대문의 높이로 그 집의 권세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이죠. 조선시대 전기만 해도 이 솟을대문은 사대부집에서만 만들 수 있었지만 후기에는 그것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솟을 대문의 처마 밑 나무를 보면 꽃잎 모양이 보입니다.
이것을 그려놓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 번째 수수께끼입니다.

답은 집이 잘 되라 비는 것. 이것은 불로초로 집안에 좋은 기운이 가득하길 바라는 염원을 담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사나 개업을 하면 문에 북어를 달아놓는 것과 비슷한 이유에서입니다.



행랑채입니다. 최참판댁은 99칸 집. 여기서 한 칸은 방 하나의 양쪽 기둥과 기둥사이를 말하는데, 옛날 머슴들이 생활했던 행랑채를 보면 방이 줄지어 있습니다. 여기서 줄행랑친다란 말이 나왔다고 하는데요, 도망친다는 줄행랑과 줄지어 있는 행랑채... 과연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요? 두 번째 수수께끼입니다.

큰 집을 관리하려면 노비의 숫자가 많아야 하는데, 이들이 사는 행랑도 많아지게 됩니다. 그래서 행랑이 줄처럼 늘어서게 되는데 이를 가리켜 줄행랑이라고 하는 것이죠. 이렇듯 원래 줄행랑이라는 말은 세도가 대단한 지역 유지, 일종의 권력을 지닌 부자 개념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줄서고 있는 권력의 판세가 바뀌거나 집안이 몰락하여 줄행랑 있는 집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어려운 상태가 되면 어떻게 할까요? 도망쳐야겠죠. 그래서 도망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줄지어 있는 행랑채를 보면 특이하게 한 칸 나오게 만든 방이 눈에 띕니다.
사대부가 건물에서 흔히 볼 수 있다는데요, 이건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세 번째 수수께끼입니다.

이곳은 은퇴하고 유람하는 식객, 선비들이 묵어갈 수 있게 한 방입니다.
그러니까 양반을 하인들이 지내는 공간에서 같이 지내게 할 수 없다 해서 이렇게 만든 것이죠.



안채로 들어가볼까요?
안채로 들어가기 전 중문채가 있습니다. 이 중문채는 곡식등을 저장하는 창고 역할도 하지만 여자들이 생활하는 안채를 보호하기 위한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대문인 솟을 대문에서 중문채의 문을 비껴놓아 만든 것은 왜 그런 것일까요? 네 번째 수수께끼입니다.


그것은 여자들이 생활하는 안채의 모습을 바로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솟을 대문에서 안채를 보면 안이 잘 보이지 않지만 안채 안방에서는 솟을대문을 드나드는 모습이 다 보인다는 것. 위의 사진을 보면 중문채 문을 통해 솟을대문 밖의 모습도 보이죠? 최참판댁을 찾으시면 정말 그런가 안 그런가 한 번 안채에서 솟을대문쪽을 보시기 바랍니다.



안채는 여자의 공간.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생활하는 곳입니다.
조선시대 유교의 영향으로 남동여서, 남자는 동쪽, 여자는 서쪽에서 생활했다고 하는데요,
안채를 여자의 공간이라고 했는데, 그럼 부부가 살 때 남편은 이곳에서 같이 지내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남편은 사랑채에서 지냅니다. 잠도 따로 자구요. 그러다가 손 없는 날, 좋은 날이라고 받은 날이 되면 남편이 몸종을 불러 “오늘 안방마님에게 00시에 간다고 전해라” 하고 밤이 되면 건너가 동침을 했다고 합니다. 자손이 귀했던 조선시대, 좋은 자손을 얻기 위해서 말이죠.



소설 ‘토지’에서 주인공 서희가 생활했던 별당채입니다.
조선시대 사대부가에서는 남녀칠세 부동석. 7살이 되면 어머니와 떨어져 나와 이 별당채에서 유모와 생활했다고 하는데, 규수가 지내는 곳이니 규채라고도 합니다.
이곳에서 연못을 볼 수 있는데, 담 안에 있는 연못이라 연담이라고도 한다네요.
그런데 연못을 4각으로 만든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다섯 번째 수수께끼입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 해서 4각형은 땅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땅에 뿌리를 둔 소나무가 가지를 하늘로 뻗어 땅의 일을 하늘로 전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물론 연못을 만든 이유는 화재가 났을 때 불을 끄는 방화시설로도 활용하기 위함입니다.


최참판댁을 찾으시면 낮은 굴뚝을 보게 됩니다. 집 뒤에는 높은 굴뚝이 있는데 왜 이 굴뚝은 이렇게 낮게 만들었을까요? 여섯 번째 수수께끼입니다.

설명을 들어보니 보릿고개 때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곤란을 겪으니 양반집에서도 마을사람들의 배고픔을 의식해 낮은 굴뚝이 있는 아궁이에 밥을 해 연기가 바닥에 깔리게 했다는 것인데... 과연 그랬을까요? 저는 당시 양반들이 그렇게까지 사람들을 생각했을 것같지 않습니다. 또 한 가지 병충해가 올라올 때 낮게 깔리는 연기로 병충해를 막는 역할도 했다는데, 이것도 별로 수긍은 안 가지만 그래도 앞의 이유보다 차라리 이게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후원으로 가면 장독대가 나옵니다. 액막이 하는 금줄도 그대로 재현해 놓았는데, 이곳은 시집 온 며느리가 시집살이의 설움을 달랠 수 있는 곳이죠. 그리고 어머니가 새벽에 정안수를 떠놓고 멀리 있는 자식이 잘 되라고 비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달랑 물만 올려놓고 비는 게 의아했더랬습니다. 물에 비는 것일까? 아니면 신에게 물만 달랑 바치는 것일까요?
일곱 번째 수수께끼입니다.

설명을 들어보니 물을 떠 놓으면 그 물에 달이 비치죠. 그 달에 바람을 빌었다고 합니다. 듣고 보니 그런 것같죠?



후원 뒤에는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 있습니다.
이곳에 4대까지 위패를 모셨다가 제사 때 그 위패를 안채나 사랑채로 모셔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집을 나가고 들 때 이곳에 들러 인사를 드린 후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조상을 섬기는 효의 정신을 잘 볼 수 있는 곳, 지금은 어떤가요? 부모가 들어와도 방에서 스마트폰만 보는 아이들이 많죠?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사랑채로 가볼까요? 남자의 공간사랑채로 가는 길, 특이한 건 담이 낮습니다. 이 길을 통해서 남편이 안채를 오가기 때문에 이것을 내외담, 눈썹 모양을 하고 있어서 눈썹담이라고 한다네요.


사랑채 뒤엔 뒷채가 있습니다. 곳간열쇠를 며느리에게 물려주면 집안살림에서 은퇴한 노부부가 이곳에서 생활하게 되는데, 노부부가 살기 전이나 부모님이 안 계신 경우 이곳에서 지내는 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누구일까요? 여덟 번째 수수께끼입니다.

답은 첩입니다. 축첩제도가 있었던 조선시대, 첩이 있는 경우엔 이곳에서 애첩이 살기도 했다고 합니다. 남자의 입장에선 안채의 본처 눈치 안 보고 왔다 갔다 하기 편하니 좋았겠죠?


사랑채입니다. 사랑채는 남자의 공간으로 남편이 생활하고, 또 손님들이 찾아오면 맞이하는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최참판댁을 찾으시면 이 누마루에 꼭 올라 앉아 보시기 바랍니다. 최참판댁에서 좋은 기를 많이 받을 수 있는 곳이 세 곳 있는데, 그 중 이곳이 가장 좋은 곳이라고 합니다. 그럼 이 누마루를 포함한 나머지 두 곳은 어디일까요? 아홉 번째 수수께끼입니다.

답은 솟을대문, 별당채 연못, 그리고 이 누마루입니다. 세 곳 중 가장 좋은 곳이 여기라는데요, 이 누마루에 앉아 보면 백운산이 보입니다. 지리산에서 백운산이 보이는 곳이 최고 길지라 하고, 남쪽 지리산에서 백운산 정상이 보이지 않으면 명당도 좋은 절터도 아니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 백운산을 바라볼 수 있는 이곳이 좋은 곳이겠죠?



더구나 마루 장식에 구름, 용을 만들어놓았으니 구름을 타고 떠 있는 신선이 된 느낌도 받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한 가지가 이뤄진다고 하니 소원을 빌어보시는 것도 좋겠죠?



이렇게 최참판댁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동에 가시면 꼭 최참판댁에 들러 그 이야기들과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서정원이 찾아간 별서정원


제 이름은 서정원.
인터넷에 제 이름을 쳐서 검색해보면 먼저 축구선수였던 서정원감독이 나오고 그 다음 나오는 것이 ‘별서정원’이었습니다. ‘별서정원’이란 게 뭘까? 궁금해 찾아보니 ‘별서’란 저택에서 떨어진 인접한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서 자연을 즐기며 은둔생활을 즐기기 위해 만든 제2의 주택. 별장과 비슷한 의미로 그러니까 ‘별서정원’은 출세를 접고 은둔해 살고자 살림집과 떨어진 곳에 지은 별채에 딸린 정원을 말합니다. 
호남에는 조선시대 ‘별서정원’이 세 곳 남아있는데, 담양의 소쇄원, 완도 보길도의 부용동, 그리고 강진의 ‘백운동정원’입니다. 보길도 부용동에 이어 담양 소쇄원은 이미 들러보았고 이번에 강진을 들러 ‘백운동정원’을 찾아보았습니다.


백운동정원을 찾아가는 길은 안운주차장에서 주차하고 동백터널을 지나 찾아가거나 위쪽 백운동다원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려오는 두 개의 길이 있습니다. 저는 안운주차장쪽에서 올라가기로 합니다.


주차장에 있는 ‘백운동정원’의 안내도를 보니 특이하게 조선시대의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다산 정약용선생이 1812년 제자들과 월출산을 찾았다가 백운동정원에서 하루 묵게 되었을때 이곳의 아름다움에 취해 풍광을 시로 쓰고 그림은 초의선사에게 그리게 한 것입니다. 
그림을 보면 12개의 번호가 붙어있는데요, 이것이 백운동 12경. 정약용선생이 백운동 12경중 8편을 쓰고 초의선사가 3수, 제자 윤동이 1수를 써 총 14수의 시를 썼다고 합니다.

백운동정원은 정말 비밀의 정원처럼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곳인데, 2001년 ‘백운세 수첩(白雲世守帖)’이라는 문헌이 발견되면서 그 존재가 알려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황폐화되어있던 것을 강진군에서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사랑채, 정자각, 솟을삼문을 정비, 복원한 것입니다.


동백나무와 비자나무가 터널을 이룬 곳을 지나면 백운동이란 글씨를 새긴 바위가 나옵니다. 백운동은 월출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다시 구름으로 올라가는 마을이라는 뜻인데, 입구에서 여기까지 들어오는 동백나무 숲의 작은 길이 백운동 12경중 2번째인 산다경 (山茶徑)입니다. 산다, 유차는 동백나무의 별칭인데, 동백이 흐드러지게 핀 3월에 찾으면 붉게 핀 동백터널을 지나는 환상적인 경험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백운동바위를 지나면 작은 다리를 건너게 되는데, 그 아래가 백운계곡.
이곳이 제 4경 홍옥폭(紅玉瀑)입니다. 폭포물에 단풍나무의 붉게 물든 단풍이 비치면 물색이 마치 홍옥과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아쉬운 건 물이 말라 거의 흐르지 않고 있다는 것. 그러니까 백운동의 4경을 제대로 보려면 가을철 비가 많이 온 다음날, 단풍이 제대로 물들었을 때 찾으시면 멋진 모습을 볼 수 있을 것같습니다.



이곳에서 고개를 들면 우뚝 솟은 작은 바위 절벽이 보이는데, 이곳이 제 6경인 창하벽(蒼霞壁)입니다. 다산 정약용선생은 시에서 이곳에 붉은색 먹으로 글자를 써두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림을 보면 6번 아래 글씨가 보이죠? 물론 지금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백운동정원의 제 10경은 풍단(楓壇). 창하벽위에 붉게 물든 단풍나무가 심어진 단으로 가을이면 단풍 잎이 붉은 비단 커튼을 둘러친 것 같대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럼 이제 정원으로 들어가볼까요?
들어가면 우선 연못이 눈에 들어오는데, 특이한 것은 계곡물을 끌어들여 정원을 굽이굽이 돌고 나가게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제 5경 유상곡수(流觴曲水). 여기서 ‘유상’이란 물길 위로 술잔을 흘려 띄운다는 말. 그러니까 배 모양의 잔 받침을 놓고 술잔을 띄워 보내며 술을 마셨나봅니다. 

“담장을 뚫고 여섯 굽이 흐르는 물이 고개를 돌려 담장 밖을 다시 나간다. 어쩌다 온 두 세분 손님이 있어 편히 앉아 술잔을 함께 띄우네.”

꽃 향기 가득한 봄 날 물을 타고 온 술잔의 술을 들어 마시면 그 맛이 어땠을까요? 
일반 민간 정원에 유상곡수가 조성되어 있는 것은 이곳 백운동정원이 유일하다고 하니 이곳을 만든 주인장은 꽤 멋스러운 이었을 것같습니다. 

이 곳을 만든 이는 처사 이담로(李聃老·1627년~1701년). 그가 본격적으로 정원을 가꾸기 시작한 것은 만년에 손자 이언길을 데리고 들어와 살면서 부터로 백운동정원을 만든 이담로 처사는 세상을 뜰 때 “절대로 남에게 넘겨서는 안 된다”라고 당부했고, 지금까지 원주 이씨가문에서 12대에 걸쳐 지켜오고 있었습니다. 
그 중 이시헌은 강진에 귀양와 있던 다산 정약용의 막내 제자가 되어 이곳에 정약용선생과 초의선사등을 초대해 지금까지 전해지는 백운동그림을 그리게 된 것입니다.


 
제9경은 취미선방(翠微禪房)으로 산허리에 있는 꾸밈없고 고즈넉한 작은 방입니다.
본채 아래 초가지붕의 세 칸짜리 사랑채로 가만히 보고 있자니 정약용 선생과 주인이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바람이 대나무에 스칠 때 그 소리를 해칠까 조용조용 이야기를 나누며 차향을 즐기는 이들의 모습이 말이죠.


그들이 바람에 서걱거리는 대나무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옆에 대나무숲이 있기때문. 이곳이 제 12경 운당원(篔簹園)인데요, 늠름하게 서 있는 왕대나무 숲이 지금도 잘 보존돼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마 이곳에 앉아 철마다 따로 피는 모란과 매화를 감상했을 것 같습니다.
제 8경은 모란을 심은 화단인 모란체(牧丹砌). 그림에서는 모란을 그리지 않았는데 초의선사가 그림을 그릴 당시 모란이 피지 않아서였을까요? 아니면 화면 구도상 그런 것일까요?

또 제 3경인 백매오(百梅塢). 언덕에 100그루의 매화가 심어져 있었다는데 그림에는 붉게 핀 홍매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그림에 있는 기와집은 아직 복원이 안되어 있는데 2018년까지 복원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별서정원을 나와 앞에 있는 작은 언덕으로 올라갑니다.
이 언덕이 제 7경. 정유강(貞蕤岡) 용비늘처럼 생긴 붉은 소나무가 있는 언덕입니다.
올라가 보니 정말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가 당당한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덕위에 있는 정자는 백운동정원의 제 11경. 신선이 머물렀다는 옥판봉이 보이는 창하벽위의 정자 정선대(停仙臺)입니다.


정선대에 올라서 보면 옥판봉의 웅장한 자태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이 월출산 옥판봉이 제 1경입니다. 삐죽삐죽 솟아있는 옥판봉을 다산 정약용선생이 백운동의 첫 번째로 손꼽는 풍경이었다고 합니다.


정선대에서 본 백운동정원의 모습입니다. 이곳은 비밀의 정원이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차문화에 있어서도 중요한 곳입니다. 
2006년 차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 전문 서적인 '동다기' 필사본이 발견돼 우리나라 차문화 발상지로 평가받고 있는데, 그것을 발견하게 된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정민 교수가 2006년 물어 물어 이곳을 찾았는데, 그때 12대째 이곳을 지켜온 주인 이효천 옹이 적대적으로 대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책상에 정민교수가 쓴 책 두 권이 있어 이거 제가 쓴 책이네요. 했더니 그 다음부터 정민교수를 알아본 주인은 온갖 자료를 다 보여줬다는 것이죠. 그러다가 주인이 초서로 된 책을 보여주며 뭔지 알아봐 달라고 했는데, 이 책이 바로 전설의 차 관련 서적 ‘동다기’필사본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논문으로 발표하자 차 관련 학계가 발칵 뒤집혔다고 합니다.

또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시판차 ‘백운옥판차’의 배경이 된 곳으로 우리나라 차 문화의 산실이기도 합니다. 100여년 전 이한영 선생이 최초로 차를 상품화한 ‘백운옥판차’와 ‘금릉월산차’ 를 출시했는데, 일제강점기 사라져가던 국산차의 명맥을 이을 수 있었던 것이죠.

이렇게 백운동정원은 자연과 어울린 전통 정원이기도 하지만 역사가 담겨있는 정원입니다. 혹시 강진을 찾게 되시면 월출산자락의 백운동정원을 꼭 들러보시기 바랍니다. 무위사에서 2킬로미터 정도 떨어져있는 곳이니 무위사를 둘러보시고 천천히 산책하면서 찾으셔도 좋을 듯합니다. 가는 길 내내 차밭과 월출산을 보실 수 있어 기분도 상쾌해지니까요.

2017년 3월 22일 수요일

마분지에 원고를 쓴 소설가, 욕먹듯 밥을 먹었던 시인을 만나다


 
혹시 소설가 이문희, 임영조 시인을 아십니까? 모르신다면... 처음 들어본 이들이라면... 저와 함께 이 두 문인을 만나러 함께 가보시죠. 


보령시의 문화와 정신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
2013년 문을 연 보령 문화의 전당입니다.
이곳에는 보령문화원, 관광홍보관, 갯벌생태과학관과 보령박물관 그리고 별관에 보령문학관이 모여있습니다. 
 

보령문학관에는 보령지역 출신 문인 두 분의 삶과 작품세계를 전시해 놓고 있는데, 그 주인공은 소설가 이문희 작가와 임영조 시인입니다.



먼저 보령 출신의 소설가 이문희님. 저는 이곳에서 처음 그의 이름과 작품을 알게 되었습니다.

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를 전시관 한편에 애니메이션 영상으로 제작해 관람객들이 볼 수 있게 해 놓았는데, 그 내용을 보니 1957년도에 있었던 일이네요. 당시 ‘현대문학’지의 신인추천 심사위원인 김동리 선생은 수북하게 쌓인 원고지 속에서 마분지에 쓴 원고가 있는 것을 보고 읽지도 않고 휴지통에 버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추천할 만한 작품이 없었고,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버렸던 마분지원고를 다시 꺼내 들고 읽었고, 작품성에 깜짝 놀란 김동리 선생이 마분지에 쓴 이문희작가의 작품을 당선시켰다는 일화입니다.
이렇게 1957년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문희 작가는 막걸리처럼 텁텁하고 소탈한 문체와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능력으로 김동리 선생이 ‘소설을 타고난 사람’이라 칭찬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소설을 타고난 사람이다. 피가 마르도록 생각을 쥐어짜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척척 쓰는 대로가 소설이 되어 떨어지기 마련인 그런 사람이다."
                                                     - 1957년 ‘현대문학’ 김동리 소설추천기




궁금한 마음에 그에 대해 더 알아보았습니다. 이문희 작가는 1933생.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1990년 돌아가셨는데, 57년 ‘현대문학’에 단편 ‘왕소나무의 포효’가 추천되어 등단, 80여 편의 장,단편소설을 남겼고, ‘현대문학’에 연재했던 장편 ‘흑맥’으로 1965년 제11회 현대문학신인상을 수상했고, 1981년 장편 ‘산바람’으로 대한민국문학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우리 문학에서 보기 드문 충청도 방언의 능숙한 사용은 그의 문체를 더욱 빛냈다고 하는데 그런 그를 설명하고 있는 문학관의 안내문엔 ‘문학 연구가들의 본격적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한 번도 문학계에서 집중적인 조명을 받지 못해 그를 아끼는 독자와 평론가들이 안타깝게 생각한다는데, 왜 이렇게 알려지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문단에서 교류가 부족했거나, 문단의 유행을 타지 않고 그만의 작품세계를 고집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문희작가가 쓴 장편소설 '흑맥'입니다. 1963년 현대문학 12월호부터 1년간 연재된 작품으로
6.25 한국전쟁 뒤 서울역 주변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전쟁이 가져다 준 인간들의 어두운 삶을 그린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1965년이만희 감독, 신성일, 문희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집니다. 영화에서 깡패역인 신성일이 아름답고 순수한 아가씨 문희를 사귀면서 깡패짓을 청산하려 하는데 깡패들이 자신들을 배신한 신성일에게 복수, 비극적인 결말로 끝나는 내용. 이 영화로 문희라는 배우는 대종상영화제에서 신인상을 받아 스타의 길을 걷게 되고,  제 9회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 제 3회 청룡영화상 촬영상, 음악상, 미술상을 받게 됩니다.


이문희 작가와 만남에 이어 임영조 시인을 만납니다.
그의 본명은 임세순. 1943년 보령시 주산면에서 태어나 1970년 월간문학 제 6회 신인상 시 부문에 ‘출항’ 당선, 7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목수의 노래’가 당선되어 본격적인 활동을 한 시인입니다.
그의 스승은 ‘껍데기는 가라’로 유명한 신동엽 시인. 중학교 2학년 때 지리선생님으로 부임해 온 선생님인 신동엽 시인이 그의 글재주를 알아보고 계속 글을 쓸 것을 권해 시를 배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동엽 시인은 임영조 시인을 글 잘 쓰는 제자로 키우기 위해 혹독한 연습을 시켰다고 합니다. 일주일에 시 한 편씩을 써서 보이면 ‘이 말이 걸린다. 다음에 고쳐와라’ ‘꼭 이 말 밖에 없을까? 다시 생각해봐’ 이런 식으로 한 편을 완성시키는데 석 달이 걸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명의 시인을 만들어 낸 스승 신동엽 선생은 훗날 임영조 시인에게 평생의 한으로 남게 된다고 합니다.


임영조 시인이 제대를 3개월 앞두고 있던 1969년 봄. 잠깐 다녀가라는 스승 신동엽 시인의 전갈을 받았는데, 하필 그 때 김신조등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찾아뵙지 못했고, 얼마후 스승인 신동엽시인의 부음소식을 들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게 시인에겐 평생의 회한으로 남았다고 합니다.




임영조 시인에게 신동엽 시인과 함께 시를 쓰게 한 또 다른 스승은 가난이었습니다.  보령의 시골마을... 아버지는 집안을 돌보지 않았고, 어머니가 베를 짜 식구들이 겨우 밥을 먹었다고 합니다. 학교도 서울 대동상고를 다녔는데, 서울전신전화국 급사로 일하면서 공부하느라 5년만에야 졸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사진을 보면 '1971년 총각시절 끝머리쯤 도화동 산꼭대기 자취방에서. 재산은 저 두 개의 빛나는 상장뿐'이라는 글이 보이는데, 산꼭대기 판잣집, 책장을 제외하면 가구도 없고 누울자리만 있는 그런 좁은 방에서 그는 시를 썼고, 등단을 합니다.

그가 쓴 작품을 보면 그의 어린시절 가난을 볼 수 있는 시도 있습니다.



고2 때 기말시험 보던 날

납부금 안 냈다고 쫓겨난 나는
고향집에 내려가 식구들 몰래
새끼 밴 염소를 내다 팔았다


간재재 넘어 삼십여 리 길
팔려가는 낌새를 알아차린 듯
거품 물고 버티며 울부짖던 염소를
판교장에 끌고 가 헐값에 팔았다


삼십 년 지난 오늘
이제야 비로소 깨닫느니
내가 염소를 내다 판 게 아니라
염소가 나를
대처에 판 걸 알았다

이 고달픈 生을
어디에 안녕히 뿌려놓지 못하고
세월의 볼모처럼 덜미잡힌 채
날마다 헐레벌떡 끌려온 내가
굴레 쓴 염소임을 알았다.
                     <염소를 찾아서 3 / 임영조 >

옛날엔 소를 키워 자식을 대학에 보냈는데, 아마 시인의 집은 소를 살 형편도 안되었던 것일까요? 염소를 키웠는데, 그래도 집안의 재산이었던 울부짖는 염소, 그것도 새끼 밴 어미를 팔아야 했던 시인의 가난. 그것은 임영조 시인의 시세계에 깔려있었습니다.




가난과 함께 한 임영조 시인의 또다른 스승은 외로움이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의 또 다른 말은 외로움일텐데, '혼자 먹는 밥'이라는 그의 시를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먹기 위해 사는가, 묻지 마라
누구나 때가 되면 먹는다
살기 위해 먹는가, 어쨋거나
밥은 산 자의 몫이므로 먹는다
빈둥빈둥 한나절을 보내도
나는 또 욕먹듯 밥을 먹는다

은행에서 명퇴한 동창생은 말한다
(위로인지 조롱인지 부럽다는 듯)
시 쓰는 너는 밥값한다고
생산적인 일을 해서 좋겠다고 말한다

나는 아직 이 세상 누구를 위해
뜨끈한 밥이 돼본 적 없다
누구의 가슴을 덥혀줄 숟갈은커녕
밥도 안 되고 돈도 안 되는
시 한 줄 못 쓰고 밥을 먹다니!
                               '<혼자 먹는 밥. 임영조>

'빈둥빈둥 한나절을 보내도 나는 또 욕먹듯 밥을 먹는다.'
'시 한 줄 못쓰고 밥을 먹다니!'
외로운 시인은 혼자 밥을 먹으면서 그 고독한 세계 속에서 시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죄책감을 갖고 살았던 것같습니다. 외로움, 고독감, 좋은 글을 써내야 하는 부담감... 그것은 글쓰는 이의 천형같은 운명이겠죠. 하지만 그렇게 겪은 아픔이 바탕이 되어서일까 그의 시는 친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편안함을 준다고 합니다.
 



시인은 사당동 총신대역 부근에 집을 얻어, 방 한 칸을 ‘이소당’이란 당호를 붙인 집필실로 만들고 글을 씁니다.
이소(耳笑)는 임영조 시인의 호. 서라벌예대에서 가르침을 받은 스승 서정주 시인이 '너는 귀로 웃으니 이소라는 호가 좋겠다.'며 받은 호입니다. 
문학관에는 이소당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는데, 임영조 시인은 생전에 그의 집필실 '이소당'을 두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비록 남루한 집이나마 나처럼 등이 시린 사람들 두루 찾는 아랫목같이 따뜻한 시집으로 기억됐으면 좋겠다”
그런데 문학관에서 재현해 놓은 방은 그런 따뜻함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뭔가 잘 꾸며놓은 느낌이랄까... 그리고 그가 바랐던 따뜻함이 아니라 겨울 달빛의 차가움같은 것이 느껴지는... 그것이 좀 아쉬웠습니다.


혹시 그리운 사람 올까
가끔 귀 열어놓는다. 허나
허리 삔 바람소리 또 스산하니
문 닫고 귀로 웃는 집이다.
                        < 이소당 시편1 중. 임영조>




"나의 시쓰기는 한 그루의 꽃나무를 가꾸는 정성으로 혼신을 다해 시의 꽃을 피워내고 독특한 향기로 미지의 세계를 향해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고자 노력한다." - 임영조시인의 시론입니다.
그런데 그의 시쓰기에 대한 표현이 조금 잘못된 것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꽃나무를 가꾸는 정성이 아니라 꽃을 피우기 위한 정성이 더 맞는 표현 아니었을까요? 사람들은 꽃이 피면 다들 아름답다고 감탄하지만 그 꽃을 피우기 위해 나무가 겪었을 산고의 고통까지 생각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좋은 시를 보면 시 좋다고 느끼지만 시인이 그 시 한 편을 만들기 위해 고독속에서 겪었을 고통을 대개는 느끼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임영조 시인이 꽃나무가 꽃을 피우는 정성으로란 표현을 썼다면 더 좋았을 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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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조시인은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좋은 시인이 되려면 좋은 시 300편을 암송하고, 200편을 쓰고 100편을 퇴고해야 한다."
시인은 시류에 편승하는데 급급해 다른 시인의 작품, 훌륭한 시를 읽지 않는 다른 시인, 문학도들에게도 일침을 가했던 것이죠.


 



임영조 시인은 그렇게 치열하게 시를 써 여섯권의 시집을 남겼고, 서라벌 문학상, 소월시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쉽게도 2003년 췌장암으로 60세 짧은 삶을 마감했습니다.


 

문학관을 나오는 길, 담장을 보면서 문학과 담 쌓고 사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라고 누군가 의도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담 쌓고 살았던 문학의 담너머를 자주 넘겨라도 보고, 그 안으로 자주 찾아 들어가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습니다.

보령문학관, 이곳을 찾아 모르고 있던 두 명의 작가를 알고나니 새삼 이 공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자극적인 TV프로그램과 스마트폰에서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속에 문학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문학의 향기는 점점 시들고 있는데, 이렇게 문학관이 있어 후대의 사람들이 자칫 잊혀져 사라질뻔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건 정말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또 다른 보령출신 작가인 '관촌수필'의 이문구 작가도 이곳에서 만날 수 있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시 한 줄 안 읽는 사회... 시를 마음에 담고 살기 힘든 시대...
우리 정신은 피폐해져갑니다. 물질은 풍요로울지 모르나 정신이 가난한 사회에서 바삐 쫓기듯 살아가는 현대인들. 그런 우리들을 위해 곳곳에 이런 문학관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아빠, 시가 뭐지? 소설이 뭐야?
혹시나 조만간 이런 질문을 아이들에게 받지 않게라도 말이죠.

아. 그리고 이곳을 찾기 전에 두 문인의 작품을 먼저 읽고 찾으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것같습니다. 그냥 둘러보기엔 많은 이야기가 곳곳에 숨어있는 곳, 작은 공간이지만 큰 울림으로 다가온 곳, 보령문학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