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22일 수요일

마분지에 원고를 쓴 소설가, 욕먹듯 밥을 먹었던 시인을 만나다


 
혹시 소설가 이문희, 임영조 시인을 아십니까? 모르신다면... 처음 들어본 이들이라면... 저와 함께 이 두 문인을 만나러 함께 가보시죠. 


보령시의 문화와 정신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
2013년 문을 연 보령 문화의 전당입니다.
이곳에는 보령문화원, 관광홍보관, 갯벌생태과학관과 보령박물관 그리고 별관에 보령문학관이 모여있습니다. 
 

보령문학관에는 보령지역 출신 문인 두 분의 삶과 작품세계를 전시해 놓고 있는데, 그 주인공은 소설가 이문희 작가와 임영조 시인입니다.



먼저 보령 출신의 소설가 이문희님. 저는 이곳에서 처음 그의 이름과 작품을 알게 되었습니다.

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를 전시관 한편에 애니메이션 영상으로 제작해 관람객들이 볼 수 있게 해 놓았는데, 그 내용을 보니 1957년도에 있었던 일이네요. 당시 ‘현대문학’지의 신인추천 심사위원인 김동리 선생은 수북하게 쌓인 원고지 속에서 마분지에 쓴 원고가 있는 것을 보고 읽지도 않고 휴지통에 버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추천할 만한 작품이 없었고,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버렸던 마분지원고를 다시 꺼내 들고 읽었고, 작품성에 깜짝 놀란 김동리 선생이 마분지에 쓴 이문희작가의 작품을 당선시켰다는 일화입니다.
이렇게 1957년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문희 작가는 막걸리처럼 텁텁하고 소탈한 문체와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능력으로 김동리 선생이 ‘소설을 타고난 사람’이라 칭찬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소설을 타고난 사람이다. 피가 마르도록 생각을 쥐어짜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척척 쓰는 대로가 소설이 되어 떨어지기 마련인 그런 사람이다."
                                                     - 1957년 ‘현대문학’ 김동리 소설추천기




궁금한 마음에 그에 대해 더 알아보았습니다. 이문희 작가는 1933생.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1990년 돌아가셨는데, 57년 ‘현대문학’에 단편 ‘왕소나무의 포효’가 추천되어 등단, 80여 편의 장,단편소설을 남겼고, ‘현대문학’에 연재했던 장편 ‘흑맥’으로 1965년 제11회 현대문학신인상을 수상했고, 1981년 장편 ‘산바람’으로 대한민국문학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우리 문학에서 보기 드문 충청도 방언의 능숙한 사용은 그의 문체를 더욱 빛냈다고 하는데 그런 그를 설명하고 있는 문학관의 안내문엔 ‘문학 연구가들의 본격적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한 번도 문학계에서 집중적인 조명을 받지 못해 그를 아끼는 독자와 평론가들이 안타깝게 생각한다는데, 왜 이렇게 알려지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문단에서 교류가 부족했거나, 문단의 유행을 타지 않고 그만의 작품세계를 고집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문희작가가 쓴 장편소설 '흑맥'입니다. 1963년 현대문학 12월호부터 1년간 연재된 작품으로
6.25 한국전쟁 뒤 서울역 주변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전쟁이 가져다 준 인간들의 어두운 삶을 그린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1965년이만희 감독, 신성일, 문희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집니다. 영화에서 깡패역인 신성일이 아름답고 순수한 아가씨 문희를 사귀면서 깡패짓을 청산하려 하는데 깡패들이 자신들을 배신한 신성일에게 복수, 비극적인 결말로 끝나는 내용. 이 영화로 문희라는 배우는 대종상영화제에서 신인상을 받아 스타의 길을 걷게 되고,  제 9회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 제 3회 청룡영화상 촬영상, 음악상, 미술상을 받게 됩니다.


이문희 작가와 만남에 이어 임영조 시인을 만납니다.
그의 본명은 임세순. 1943년 보령시 주산면에서 태어나 1970년 월간문학 제 6회 신인상 시 부문에 ‘출항’ 당선, 7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목수의 노래’가 당선되어 본격적인 활동을 한 시인입니다.
그의 스승은 ‘껍데기는 가라’로 유명한 신동엽 시인. 중학교 2학년 때 지리선생님으로 부임해 온 선생님인 신동엽 시인이 그의 글재주를 알아보고 계속 글을 쓸 것을 권해 시를 배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동엽 시인은 임영조 시인을 글 잘 쓰는 제자로 키우기 위해 혹독한 연습을 시켰다고 합니다. 일주일에 시 한 편씩을 써서 보이면 ‘이 말이 걸린다. 다음에 고쳐와라’ ‘꼭 이 말 밖에 없을까? 다시 생각해봐’ 이런 식으로 한 편을 완성시키는데 석 달이 걸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명의 시인을 만들어 낸 스승 신동엽 선생은 훗날 임영조 시인에게 평생의 한으로 남게 된다고 합니다.


임영조 시인이 제대를 3개월 앞두고 있던 1969년 봄. 잠깐 다녀가라는 스승 신동엽 시인의 전갈을 받았는데, 하필 그 때 김신조등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찾아뵙지 못했고, 얼마후 스승인 신동엽시인의 부음소식을 들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게 시인에겐 평생의 회한으로 남았다고 합니다.




임영조 시인에게 신동엽 시인과 함께 시를 쓰게 한 또 다른 스승은 가난이었습니다.  보령의 시골마을... 아버지는 집안을 돌보지 않았고, 어머니가 베를 짜 식구들이 겨우 밥을 먹었다고 합니다. 학교도 서울 대동상고를 다녔는데, 서울전신전화국 급사로 일하면서 공부하느라 5년만에야 졸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사진을 보면 '1971년 총각시절 끝머리쯤 도화동 산꼭대기 자취방에서. 재산은 저 두 개의 빛나는 상장뿐'이라는 글이 보이는데, 산꼭대기 판잣집, 책장을 제외하면 가구도 없고 누울자리만 있는 그런 좁은 방에서 그는 시를 썼고, 등단을 합니다.

그가 쓴 작품을 보면 그의 어린시절 가난을 볼 수 있는 시도 있습니다.



고2 때 기말시험 보던 날

납부금 안 냈다고 쫓겨난 나는
고향집에 내려가 식구들 몰래
새끼 밴 염소를 내다 팔았다


간재재 넘어 삼십여 리 길
팔려가는 낌새를 알아차린 듯
거품 물고 버티며 울부짖던 염소를
판교장에 끌고 가 헐값에 팔았다


삼십 년 지난 오늘
이제야 비로소 깨닫느니
내가 염소를 내다 판 게 아니라
염소가 나를
대처에 판 걸 알았다

이 고달픈 生을
어디에 안녕히 뿌려놓지 못하고
세월의 볼모처럼 덜미잡힌 채
날마다 헐레벌떡 끌려온 내가
굴레 쓴 염소임을 알았다.
                     <염소를 찾아서 3 / 임영조 >

옛날엔 소를 키워 자식을 대학에 보냈는데, 아마 시인의 집은 소를 살 형편도 안되었던 것일까요? 염소를 키웠는데, 그래도 집안의 재산이었던 울부짖는 염소, 그것도 새끼 밴 어미를 팔아야 했던 시인의 가난. 그것은 임영조 시인의 시세계에 깔려있었습니다.




가난과 함께 한 임영조 시인의 또다른 스승은 외로움이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의 또 다른 말은 외로움일텐데, '혼자 먹는 밥'이라는 그의 시를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먹기 위해 사는가, 묻지 마라
누구나 때가 되면 먹는다
살기 위해 먹는가, 어쨋거나
밥은 산 자의 몫이므로 먹는다
빈둥빈둥 한나절을 보내도
나는 또 욕먹듯 밥을 먹는다

은행에서 명퇴한 동창생은 말한다
(위로인지 조롱인지 부럽다는 듯)
시 쓰는 너는 밥값한다고
생산적인 일을 해서 좋겠다고 말한다

나는 아직 이 세상 누구를 위해
뜨끈한 밥이 돼본 적 없다
누구의 가슴을 덥혀줄 숟갈은커녕
밥도 안 되고 돈도 안 되는
시 한 줄 못 쓰고 밥을 먹다니!
                               '<혼자 먹는 밥. 임영조>

'빈둥빈둥 한나절을 보내도 나는 또 욕먹듯 밥을 먹는다.'
'시 한 줄 못쓰고 밥을 먹다니!'
외로운 시인은 혼자 밥을 먹으면서 그 고독한 세계 속에서 시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죄책감을 갖고 살았던 것같습니다. 외로움, 고독감, 좋은 글을 써내야 하는 부담감... 그것은 글쓰는 이의 천형같은 운명이겠죠. 하지만 그렇게 겪은 아픔이 바탕이 되어서일까 그의 시는 친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편안함을 준다고 합니다.
 



시인은 사당동 총신대역 부근에 집을 얻어, 방 한 칸을 ‘이소당’이란 당호를 붙인 집필실로 만들고 글을 씁니다.
이소(耳笑)는 임영조 시인의 호. 서라벌예대에서 가르침을 받은 스승 서정주 시인이 '너는 귀로 웃으니 이소라는 호가 좋겠다.'며 받은 호입니다. 
문학관에는 이소당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는데, 임영조 시인은 생전에 그의 집필실 '이소당'을 두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비록 남루한 집이나마 나처럼 등이 시린 사람들 두루 찾는 아랫목같이 따뜻한 시집으로 기억됐으면 좋겠다”
그런데 문학관에서 재현해 놓은 방은 그런 따뜻함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뭔가 잘 꾸며놓은 느낌이랄까... 그리고 그가 바랐던 따뜻함이 아니라 겨울 달빛의 차가움같은 것이 느껴지는... 그것이 좀 아쉬웠습니다.


혹시 그리운 사람 올까
가끔 귀 열어놓는다. 허나
허리 삔 바람소리 또 스산하니
문 닫고 귀로 웃는 집이다.
                        < 이소당 시편1 중. 임영조>




"나의 시쓰기는 한 그루의 꽃나무를 가꾸는 정성으로 혼신을 다해 시의 꽃을 피워내고 독특한 향기로 미지의 세계를 향해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고자 노력한다." - 임영조시인의 시론입니다.
그런데 그의 시쓰기에 대한 표현이 조금 잘못된 것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꽃나무를 가꾸는 정성이 아니라 꽃을 피우기 위한 정성이 더 맞는 표현 아니었을까요? 사람들은 꽃이 피면 다들 아름답다고 감탄하지만 그 꽃을 피우기 위해 나무가 겪었을 산고의 고통까지 생각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좋은 시를 보면 시 좋다고 느끼지만 시인이 그 시 한 편을 만들기 위해 고독속에서 겪었을 고통을 대개는 느끼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임영조 시인이 꽃나무가 꽃을 피우는 정성으로란 표현을 썼다면 더 좋았을 것같습니다.
.




임영조시인은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좋은 시인이 되려면 좋은 시 300편을 암송하고, 200편을 쓰고 100편을 퇴고해야 한다."
시인은 시류에 편승하는데 급급해 다른 시인의 작품, 훌륭한 시를 읽지 않는 다른 시인, 문학도들에게도 일침을 가했던 것이죠.


 



임영조 시인은 그렇게 치열하게 시를 써 여섯권의 시집을 남겼고, 서라벌 문학상, 소월시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쉽게도 2003년 췌장암으로 60세 짧은 삶을 마감했습니다.


 

문학관을 나오는 길, 담장을 보면서 문학과 담 쌓고 사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라고 누군가 의도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담 쌓고 살았던 문학의 담너머를 자주 넘겨라도 보고, 그 안으로 자주 찾아 들어가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습니다.

보령문학관, 이곳을 찾아 모르고 있던 두 명의 작가를 알고나니 새삼 이 공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자극적인 TV프로그램과 스마트폰에서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속에 문학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문학의 향기는 점점 시들고 있는데, 이렇게 문학관이 있어 후대의 사람들이 자칫 잊혀져 사라질뻔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건 정말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또 다른 보령출신 작가인 '관촌수필'의 이문구 작가도 이곳에서 만날 수 있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시 한 줄 안 읽는 사회... 시를 마음에 담고 살기 힘든 시대...
우리 정신은 피폐해져갑니다. 물질은 풍요로울지 모르나 정신이 가난한 사회에서 바삐 쫓기듯 살아가는 현대인들. 그런 우리들을 위해 곳곳에 이런 문학관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아빠, 시가 뭐지? 소설이 뭐야?
혹시나 조만간 이런 질문을 아이들에게 받지 않게라도 말이죠.

아. 그리고 이곳을 찾기 전에 두 문인의 작품을 먼저 읽고 찾으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것같습니다. 그냥 둘러보기엔 많은 이야기가 곳곳에 숨어있는 곳, 작은 공간이지만 큰 울림으로 다가온 곳, 보령문학관이었습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