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에서 문화재가 많기로 유명한 사찰 무위사.
많은 문화재 중 가장 유명하고 눈길을 끄느 것은 국보 제 13호인 바로 이 건물
극락보전이죠.
무위사의 문화재를 만나러 갔다가 먼저 온 봄을 만났습니다
무위사 극락보전 앞 마당에는 오래된 팽나무와 느티나무 세 그루가 서 있습니다.
그 옆에 작은 나무가 매화나무인데요
그 나무에 붉은색을 한 봄이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홍매화입니다.
홍매화로 유명한 곳은 백양사. 이곳 고불매는 천연기념물로 화엄사,
선암사의 매화와 함께 호남5매 중 하나이고,
또 양산 통도사, 서울 봉은사도 매화로 유명하지요.
선암사의 매화와 함께 호남5매 중 하나이고,
또 양산 통도사, 서울 봉은사도 매화로 유명하지요.
그래서 매화가 필 때 쯤이면 사진 찍는 이들이 모여들곤 하는데...
그런데 강진 무위사의 매화나무는 그들과 비교해 어찌 보면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그 나름대로의 멋이 있습니다. 어떤 멋일까요?
바로 귀로 듣는 매화의 향입니다.
대부분 꽃향기는 코로 맡지만 매화의 향은 귀로 듣는다고 합니다.
귀로 듣는 향기....
매화는 시끌벅적한 곳이 아닌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서 내 마음을 가다듬어야
비로소 그 진정한 향기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매화의 다른 이름은 화형(花兄).
모든 꽃의 맏이라 붙여진 이름으로 맏이답게
다른 꽃들이 잠든 겨울에 먼저 일어나 꽃을 피웁니다.
또 일지춘(一枝春)으로도 불리는데 한 가지에 달린 봄이란 뜻.
조선시대 선비들은 가장 먼저 깨어 봄을 전하는 매화를 사랑했습니다.
퇴계이황을 비롯해 많은 선비들이 얼마나 매화를 좋아했던지
조선시대 실학자 이덕무선생을 보면 그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를 잘 볼 수 있지요.
이덕무 선생의 별명은 간서치(看書痴), 책만 읽는 바보.
그럴만큼 책에 빠진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그가 책과 더불어 빠진 것이 매화였습니다.
그가 책과 더불어 빠진 것이 매화였습니다.
얼마나 매화를 좋아했던지 밀랍으로 매화를 직접 만들어
그것을 방에 놓고 보는 즐거움을 맛보곤 했다고 하니까요.
당시 실학자들 사이에선 매화 만드는 것이 유행이었나봅니다.
연암 박지원 선생의 편지를 하나 볼까요?
“꽃병에 11송이 꽃을 꽂아 팔아 동전 스무 닢을 얻었습니다.
형수님께 열 닢 드리고, 아내에게 세 닢, 딸에게 한 닢, 형님 방 땔나무 값으로 두 닢,
내 방에도 두 닢, 담배 사느라 한 닢을 쓰고 나니, 한 닢이 남아 이에 올려보내니
웃고 받아주면 좋겠습니다.”
이덕무에게 쓴 박지원의 편지 (출처: 미쳐야 미친다 – 정민 교수)
박지원선생은 이덕무선생에게 매화 만드는 법을 배웠고 연습 끝에
매화 11송이를 만들어 팔았던 것이죠. 참 재미있습니다.
조선시대 선비가 방안에 쭈그려 앉아 매화를 만들고... 거기다 그것을 팔아 돈을 벌었다니...
이렇게 매화는 꽃과 함께 재미있는 이야기도 함께 피워냅니다.
매화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선비가 송강 정철, 노계 박인로, 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 4대 문장가로 꼽히는 조선 중기의 문신 신흠선생입니다.
퇴계선생이 좋아했다는 신흠선생의 시 한 수를 감상해 보시죠.
桐千年老 恒藏曲 (동천연노 항장곡)
오동나무는 천년이 지나도 항상 그 곡조를 간직하고
梅一生寒 不賣香 (매일생한 불매향)
매화는 일생을 춥게 살아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
月到千虧 餘本質 (월도천휴 여본질)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질이 남아 있고
柳經百別 又新枝(유경백별 우신지)
버드나무는 백 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올라온다.
무위사의 삽살개 천둥이입니다. 순둥이인데 이 녀석도 매화 핀 봄을 느끼고 있을까요?
추운 날씨에 봄이 어디쯤 오고 있을까 조바심 나시나요?
봄은 이미 매화나무 가지 끝에서 오고 있었습니다 .
조선시대 선비들처럼 매화를 마음에 품어
이미 우리 곁에 온 봄의 따스한 온기를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2017년은 강진방문의 해..
강진을 찾으신다면 무위사에서 호젓하게 귀로 듣는 매화의 향을 느껴보시면 좋겠네요.
댓글 없음:
댓글 쓰기